K-공간

[영화 대장 김창수] 나의 숨겨진 잠재력과 고통을 찾아서
2017.10.23




<출처 : 영화 대장 김창수>

 

 

 

이 소년은 과연 누구일까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 지극히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한 청년. 엿을 먹기 위해 아버지의 숟가락을 일부러 구부려서 내다 팔고 아버지께 혼줄이 나고도 떡 한줌 입속에 넣고 마냥 해맑던 저 청년은 한국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백범 김구 선생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처럼 똑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던 그의 시대가 우리와 다르다고 한다면 나라의 주인이 대한민국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출처: 영화 대장 김창수> 

 

그에게 어떤 응축이 있었기에 지금의 김구 선생이 되었는가. 영화 <대장 김창수>는 바로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김구라는 상징적인 위인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청년기에 대해서 말이다.

 

 <일제에 맞서 싸운 한국독립군>

 

일제강점기, 광복과 분단.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가던 수많은 위인들을 볼 때면 아득히 뭔 옛날 같지만 놀랍게도 그 역변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10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

 


<출처: 영화 대장 김창수> 

 

한국이라는 공간 전반에 폭풍우가 불어 닥쳤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생물은 상처를 새겼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 상처가 분명 이어졌을 것이고 지금의 나를 지배하는 모든 정신과 육체의 세포 일부에 이 상처의 DNA가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처는 또 다른 잠재력을 선물해주었다.

 

 <출처: 영화 대장 김창수> 

 

역사를 논하기엔 너무 거창해보이지만 일제시대를 살아간 한 청년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지금 현재의 나의 잠재력과 고통을 알게 해준다면 어떠한가.

 

 <출처: 영화 대장 김창수> 

 

"인천"

경기도 황해 출신의 대장 김창수<김구로 개명하기 전 이름>에게 인천은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인천에서의 그의 경험은 대장 김창수를 김구로 성장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폭제가 된다. 로케이션 마켓은 그의 일대기를 기록한 백범 김구 기념관과 그가 청년기의 대부분을 보냈던 인천을 답사해본다.

 

 

 

백범 김구 기념관

<일제시대의 모든 기록을 보유한 한 사람의 이야기>





가을의 푸른 하늘에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던 백범 김구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2m 남짓한 백색의 동상이 태극기를 등쥐고 필자를 맞아주었다.

 

실제 190cm에 육박하던 기골이 장대한 백범 김구 선생의 아우라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으며 태양 숭배로부터 시작하여 항일의 상징이기도 했던 백의 민족정신에 중심에 선 김구 선생의 정신이 깃든 동상은 더욱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백범 김구 기념관은 그의 유년기부터 서거까지 그의 인생 전반에 대한 모든 기록을 담고 있는데, 일제시대의 발단과 광복에 이르기까지 한국 역변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가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요인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시해주고 있다.

 

 

"유난스런 개구쟁이, 김구"



그의 일대기를 다룬 만큼 기념관은 그의 유년시절에 대해서도 아주 자세하게 전시해놓았다.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유년기의 김구는 아버지의 멀쩡한 숟가락을 부러뜨려 엿을 바꿔 먹거나, 집에서 몰래 돈을 갖고 떡을 사먹으러 가는 등 유난스런 개구쟁이로 자랐다고 한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글공부를 시작하였으며, 본격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향시에서 평민과 귀족의 넘을 수 없는 벽을 실감했고, 매관매직의 실상을 보고서 그 길로 외적인 수양 보다는 마음을 닦는 내적인 수양에 힘쓰기로 했다. 아마 이것이 김구의 첫 응축이 아닐까.

 

 <그의 유년기를 영상 자료로 볼 수 있다>


 




 <어려서 부터 가난한 형편에도 글 공부에 매진한 김구>

 

기념관에는 그런 김구의 유년기를 영상 시각자료로도 볼 수 있게 하여 전연령대가 어렵지 않게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유치원 혹은 초등학교에서 견학 온 많은 아이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재미있는 시각 자료 때문인지 계속 집중하여 역사를 접하는 모습이 훈훈했다.

 

 

 

"대장 김창수"



22살의 김구. 대장 김창수.

역시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주요 대목 또한 기념관에서 상세하게 접할 수 있어서 영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원수에게 보복하는 대장 김창수>

 

치하포의거와 옥중생활.

22살의 김구가 황해도 치하포에 조선인으로 변장한 일본군 중위 스치다를 발견하자, 명성황후를 시해한 원수를 갚고자 그를 처단한 후 주막의 벽에 국모의 원수를 갚을 목적으로 이 왜놈을 죽였노라. ’ 는 포고문과 함께 해주 백운방 가동 김창수라고 당당히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3개월 후 체포되어 인천감리서로 이감되었는데 그 사건을 치하포의거로 칭해진다.

 


 <출처: 영화 대장 김창수>

 

김구는 이 후 20~30대를 보내며 7년의 시간동안 인천감리서를 비롯한 여러 형무소에서 옥중 생활을 하였고 인천축항 신설현장에 강제노역으로 투입 되었다고 하는데 영화 <대장 김창수>에서도 그의 청년기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영화 대장 김창수의 배경인 인천감리서>

 

영화의 주요배경이었던 인천 감리서를 전시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실제 영화 촬영은 전주영화종합촬영소 세트장에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죄인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형량을 선고받은 이들을 집결시킨 인천감리서. 게다가 그 당시 일본인이 가장 많이 드나들었던 인천항 주위에 자리잡은 그 곳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을까.

 

  <출처: 영화 대장 김창수>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그 시간, 그 공간에서 대장 김창수는 되려 여러 학문을 접하기도 하며 몇몇의 일본인을 죽이는 방법 보다 무고한 죄인이자 국민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그들에게 글을 가르쳐주었다고 하니 정말 위인이 아닐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고통스런 시기는 대장 김창수에게 민족의식을 고양시켜 민족지도자의 소양과 내면을 쌓을 수 있었던 중요한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는데.

 


<큰 아들 열, 작은 아들 신과 함께 한 김구>

 

나의 행동을 돌아보지 않고 내가 살고 있었던 세상만을 줄곧 탓하던 필자는 그의 강한 내면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떤 세상에 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중요하다고 그의 강인한 얼굴이 필자에게 묵묵히 말을 건네왔다.

 


  <출처: 영화 대장 김창수>


그의 처절했던 감리서 생활이 향후 독립운동에 앞장 선 위인의 필연적인 거름이 되었다는 것을 어느 누구가 알았단 말인가. 누군가의 고통과 상처에는 반드시 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의 일대기를 보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버팀목이 되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독립 운동가 김구"







그의 일대기가 중반에 접어들면서 전시장은 저절로 분위기가 엄숙해졌으며 필자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기류가 있었다. 나라의 주인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친 많은 독립운동가들.

 

전시관에서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의 유명한 시계 일화의 실재를 볼 수 있었다.

 




 

저는 이제 한시간 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시계를 교환하면서 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부디 지금은 아무런 걱정 없는 평화로운 낙원에서 만나 편하게 쉬시길 바란다



 <전시관에 마련된 추모공간> 





이 외에도 전시에는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추모공간이 따로 마련이 되어있으며 추모공간에서 실제 김구 선생의 묘소를 볼 수 있다. 한국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일제시대의 자세한 전개와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위인들의 위상을 느끼고자 하면 이곳을 기꺼이 추천한다.

 

     

"그의 버팀목이 되어줬던 사상"



대장 김창수. 22살의 백범 김구.

독립운동가로만 알려졌던 김구 선생이 승려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1898, 인천감리서를 탈옥 후 승려를 가장하여 피신했던 마곡사> 

 

전시에 기록된 그의 사상을 잠시 빌려온다.

 

동학운동, 승려, 신학 등등을 접하며 김구 선생은 이상과 같이 다양한 뿌리위에 자란 거목처럼, 거인의 사상은 다원적이었다. 새로운 사상에 접해도 기왕의 사상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층적이었고, 다양한 사상을 자기사상으로 수용하여 용해시켰다는 점에서 포괄적이었다. 그래서 백범은 해방 후 환국해서 옛 서당과 사찰을 찾았고, 고인의 무덤을 찾아 자신을 다시 채찍질 했던 것이다. 그렇게 다원적이요 중층적이요 포괄적인 사상의 뿌리를 지킨 백범이었으므로 50년간의 폭풍과 격량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인자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출처: 영화 대장 김창수> 

 

영화 <대장 김창수>에서도 단연 돋보였던 그의 인성은 포용력이었다. 수많은 죄인들과 국민을 계몽의 길로 이끌었던 힘에는 그의 강한 내면 만큼이나 사람들과의 두터운 신뢰가 있지 않았을까.

 

 



 <김구 선생이 서거 당시 입고 있었던 혈의>

 

단순히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관이 아닌 다양한 시각에서 한 인물을 조명하면서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준 곳. 기념관에는 그의 영혼이 깃들어 있었으며 후손들에게 과거의 아픔이 다시 재발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잘 묻어나오는 의미있는 공간이었다.

 

 


백범 김구 광장

<김구 선생과 그의 어머니> 


 <백범 광장이 있는 인천대공원 입구>

 

필자는 그의 일대기 전반을 볼 수 있었던 기념관에 이어 대장 김창수의 발자취를 직접 느끼고자 백범 김구광장을 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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